그림

라이브 드로잉 #35 - 삼절곤을 든 여자, 소품 그리는 재미, 약간의 역효과

dbw84 2024. 1. 22. 18:19
반응형

live drawing #35

 

오늘 그림은 실패 1회, 이동과 변형은 0회, 실행 취소 0회, 일치율은 80%로 마무리했다. 여태껏 그린 그림 중에 가장 일치율이 높은 그림이었는데, 퀄리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고민을 남긴 작업이었다.

 

삼절곤을 든 여자

대만에서 대부호의 외동딸로 태어난 링은 타고난 무술광으로 어린 시절부터 각종 무술을 섭렵했다. 그녀는 중학생 무렵에 자기가 익힌 쿵후, 우슈 동작들이 실전에서는 복싱이나 기타 무술로 수렴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에 의문을 느끼고 아버지가 소유한 반도체 회사 AI부서에 의뢰, 실전에서도 쿵후의 풍격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방식으로 싸울 수 있도록 인간을 '가르치는' 로봇을 제작한다. 링의 신체 정보와 움직이는 방식, 생활 습관과 심리적 기제까지 모두 흡수한 AI는 약 1년 동안 가상공간에서 그녀와 똑같은 더미를 훈련시키면서 그녀에게 가장 알맞은 교수법을 완성했고(실제 훈련량으로 따지자면 수천 년 혹은 약 만 년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고 한다) 마침내 현실에서 그녀에게 모든 기술을 전수하기에 이른다.
이미 익힌 타무술보다는 비효율적이고 상당히 까다로운 방식이긴 했지만, 그래도 분명하게 실전에서도 사용 가능한 방식이었으므로 링은 모든 고된 훈련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통과했고 20살 무렵에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그녀가 차츰차츰 미디어에 알려지고 유명세를 얻으면서 정통무술 계승에 자부심을 가진 대만인들뿐만 아니라 중국과 세계 곳곳에서도 전통무술의 명맥을 이을 인재가 나타났다며 그녀를 반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가짜 무술가들, 특별히는 주로 중국 쪽 가짜 무술가들을 박살내고 다니며(그런 행세가 통하는 곳은 중국 밖에 없었으므로) 그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고, 한동안은 욕을 먹으며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녀는 당연히 쿵후가 진정으로 부흥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모든 행보를 결정했고,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는 격투술이 아류 산타가 아닌 쿵후 그 차체였기에, 결국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21세기 말엽에 그녀는 중국무술의 대모로 불리게 된다.
그녀가 사랑한 삼절곤은 경찰이었던 그녀의 삼촌이 즐겨 사용하던 무기였다. AI는 그녀에게 가장 알맞은 무기술로 곤법(봉술)을 추천했지만, 그녀는 삼촌의 영향으로 끝까지 삼절곤을 고집했고, 때문에 AI가 삼절곤을 실전에서 어떻게 사용할지 시뮬레이션하는 비용으로 여태까지 든 모든 비용의 약 70% 정도를 추가로 지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AI에 관한 일화나 그녀의 무위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그녀의 자서전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까지가 그림을 그리며 상상한 대략적인 내용이다.

 

소품 그리는 재미

마음에 드는 소품 하나를 제대로 정하고 그림을 그리면 확실히 재미있다. 운이 좋으면 이번처럼 덤으로 가벼운 이야기도 얻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사실 처음에는 소품으로 검과 총이 떠올랐다. 그런데 전에 판타지풍 드로잉에서 비슷한 느낌으로 검 두 개를 교차한 구도를 그린 적이 있어서 소품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고, 양손이 각각 뭔가를 들고 있는 것보다 약간 더 유기적인 느낌을 주는 소품이 뭐가 있을까 하다가 삼절곤이 떠올랐다. 곧바로 삼절곤은 분명 좋은 선택이 될 거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얼핏 생각하기로는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연결되어 있는 독특한 구조여서 잘만 그리면 맛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칼과 총이 생각났을 때 뒷여백에는 뭘 넣지 하다가 함께 떠올렸던 거대한 로봇을 좀 더 작게 사람처럼 바꾸고 똑같이 삼절곤을 들게 하는 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그대로 적용했더니, 삼절곤-무술-훈련법-AI로 생각이 이어지면서 앞에 적은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소품 덕분에 생각지도 않았던 잔재미까지 얻게 된 셈이다.
그리려는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머릿속에 품고 있으면 굳이 그림에 반영하거나 하지 않아도 그냥 그리면서 힘이 나고 재미있기도 하고, 만약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만 있다면 내가 느낀 감정을 보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비록 이번에는 아무 생각이 없어서 떠오른 이야기를 전부 반영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이야기로 소소한 즐거움을 느낀 만큼, 혹시라도 나중에 이번과 비슷하게 그림에 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면 그때는 까먹지 말고 그 내용을 어떻게 이번보다 많이 반영할지를 좀 더 고민하면서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작업이었다.

 

약간의 역효과

failed drawings

 

얼굴 연습과 연동해서 라이브 드로잉을 진행해 보니 얼굴 그리는 고민은 안 해서 좋은데 첫 시작 퀄리티가 올라가니까 그림을 전체적으로 잘 그리려고 하는 경향이 생겨서 생각보다 힘들다. 원고에 지장이 가지 않게 잘 조절해야 하는데 여기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쏟으니... 힘을 좀 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번 그림은 그리기 어려운 시도는 크게 없어서 만족감은 최고가 아닌데 역대 그림 중에서 일치율은 가장 높았다. 생각과 어느 정도 비슷하게 나왔다는 건데, 만약 로봇 얼굴이 짝퉁 범블비가 아니라 참신한 디자인이었고 보도블록이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원형 구조(중국무술에 어울리는)였다면 처음으로 일치율 90%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번 그림에서는 중심주제인 삼절곤이 생각만큼 확연하게 드러나는 편은 아니어서 조금 아쉽긴 하다. 아무래도 무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직관적으로 삼절곤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로봇 손이 여자가 든 삼절곤 묘사에 필요한 공간을 확 잡아먹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런 그림이 나왔는데, 그래도 다행인 건 나름대로 로봇 묘사에 공을 들인 덕분에 주제는 어느 정도 드러나서 '리얼 스틸' 같은 영화가 주는 느낌을 조금은 풍기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작업을 9등분 그리드로 보면 가로 비율은 제대로 지키지 못했는데 세로 비율은 대체로 지켰다. 위 선에 여자 오른손 끝, 눈, 삼절곤 머리, 로봇 왼뺨 등이 위치했고 아래 선에 두 왼손 끝, 여자 어깨, 삼절곤 머리, 로봇 어깨와 무릎 등이 위치했다. 먹도 균형 있게 들어갔고 선 굵기도 덧칠이 다른 그림들 보다는 확실히 알맞게 들어간 편으로 여러 면에서 보기 좋은 그림이 나왔다. 실패 1회는 보다시피 크기 조절 문제였다. 같은 얼굴이 5번이나 남았는데 과연 다음에는 또 어떤 각도로 변주를 해야 할지 고민이다.

 

240122 croquis
240122 croquis.clip
1.88MB

 

*본 포스팅에 첨부한 .clip 파일은 카피레프트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