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라이브 드로잉 #36 - 독특했던 편안함, 실패 횟수 경신, 멈춤이 필요했던 작업

dbw84 2024. 1. 25. 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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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 drawing #36

 

오늘은 실패 10회, 이동과 변형은 0회, 실행 취소 0회, 일치율은 60%로 그림을 마무리했다. 실패 최고기록을 경신했는데 오히려 정신적으로는 덜 피곤한 독특한 경험을 한 작업이었다.
 

독특했던 편안함

이번 작업은 실패가 너무 많아서 정말 오래 걸렸는데도 멘털에는 별 영향이 없었는데, 그동안 내게는 얼굴을 그리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이번 실패들 덕분에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 모든 그림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그리기 시작하는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얼굴인데 내게는 항상 얼굴이 문제였다. 예쁘게 그리는 건 당연히 어려웠고, 만화 원고를 하게 되면 예쁜 건 기본에 전부 같은 사람이라는 걸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그려야 한다는 강박까지 더해져서 모든 컷에 극심하게 집착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작년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얼굴을 모든 각도에서 전부 그려놓기로 결심하고 남녀 기본형을 완성하면서, 느리긴 해도 어쨌든 원하는 느낌에 도달할 수 있는 안목이 생겼고, 원형을 만들어서 외우는 방식으로 얼굴을 연습하기 시작하고서야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연습하는 게 어떤 소용이 있을지를 그동안은 솔직히 잘 몰랐는데, 오늘 실패를 10장이나 하면서도 매번 거의 비슷하게 얼굴을 그려내는 걸 보고 있자니 지금까지 한 노력이 분명히 효과가 있구나 싶었고, 그런 내 모습이 왠지 웃기기도 하면서 그 오랜 세월 동안 고생한 게 생각나서 울컥하기도 했다. 한 번 손 풀 때 머리를 딱 6개씩만 그리는데 이번 실패 때문에 10번을 더 그렸으니 그만큼 연습한 게 아닌가. 이번 작업 덕분에 앞으로도 머리가 연습 주제일 때는 딱 그 얼굴 각도만 넣어서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패까지 포함하면 더 많이 연습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확실히 제약이 생기니까 여러모로 생각할 것도 많아지고 더 집중하게 되는 듯하다. 그런데 이게 얼굴을 고정으로 그릴 때는 몸 전체를 바꿀 수 있으니까 다양한 느낌을 내는 게 가능한데, 연습 주제가 포즈일 때는 과연 또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다. 지금처럼 다양한 주제로 그림을 소화하는 게 가능할까? 아니면 포즈는 몸 전체이기 때문에 작업이 단조로워질 수밖에 없으니 그때는 약간 융통성을 발휘해야 할까? 아무튼 주제를 딱 하나로 정해서 연습하는 건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만화를 그릴 때도 이런 독특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실패 횟수 경신

live drawing #36

 

저번에 여자친구 뱃살 잡는 그림에서도 느꼈지만, 약간 구도를 과장한 그림도 내 실력으로 라이브 드로잉에서 구현하기에는 아직 무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미 머릿속에 있는 몇몇 비율은 그냥 그릴 수 있겠지만, 처음으로 설계해서 내놓아야 하는 비율은 이런 식으로 작업하는 게 과연 효과적일지, 혹시 비효율적이면서 각인 효과도 미미한 건 아닐지 하는 걱정도 조금은 들었다. 이건 앞에서 말한 얼굴 그리기처럼 얼마나 효과적인지 시험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이런 건 포즈 자체 보다도 그 포즈에 도달하는 과정 자체를 암기해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그런 자각은 전혀 없이 그리고 있어서 나중에 도움이 될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느낌이기도 하다.
그나마 오늘 작업에서 얻은 기준을 모아보면 1) 이런 자세에서 위팔을 그릴 때 머리 크기와 상관관계를 고려하여 어느 정도 길이로 그려야 하는가, 2) 이 자세에서는 허리가 앞으로 얼마나 기울어져야 하는가, 3) 등 쪽 선과  접힌 발 가장 바깥 정강이 선은 어느 정도 각도로 틀어져야 하는가(사실 마지막 그림에서는 이 부분을 잘 반영하지 못했다), 4) 9등분 그리드에서 쪼그린 전신이 나올 때 머리크기와 위치는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번 그림은 뻗은 다리로만 치면 내가 처음에 생각한 구도와 거의 일치하게 나오긴 했는데(오히려 몸 자체와 접은 다리는 다른 실패 그림이 낫기도 하다) 이게 생각보다 덜 과장된 구도여서 오히려 더 어려웠던 것 같기도 하다. 덜 과장된 구도를 떠올려놓고도, 막상 그리려니 '무의식적으로 과장된 그림은 으레 광각이 많이 들어갔겠거니' 하다가 실패를 많이 한 듯한데, 앞으로 실패를 줄이려면 이런 내 생각 자체를 빨리 알아채는 것도 꽤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역대급으로 실패 횟수를 경신하면서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는 작업이었다.

 

멈춤이 필요했던 작업

이번 그림은 전체적으로 9등분 그리드에 잘 맞게 나왔다. 팬티 라인과 팔 정도가 등분선을 가로로 잘 타고 있고, 그 선을 기준으로 운동 도구들이 그리드 중간 등분을 채우고 있다. 세로로 보면 우선 몸 자체가 오른편 등분선에 위치하면서 리듬을 만들고 있고 왼편 등분선에는 큰 흰색 클럽벨이 위치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거울 위편, 운동기구, 바닥' 이렇게 크게 나눈 구도가 그림을 안정적으로 보이게 해주고 있으며, 거기에 조금씩 위치한 검은색 소품들이 심심함을 줄여주고 있다. 알맞은 머리 크기와 위치는 10번이나 틀리면서 지금 같은 전신 구도를 그리고 싶다면 위쪽 등분 중간쯤에 두면 알맞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가슴을 너무 뾰족하게 그려버렸다는 점인데, 가슴 크기를 너무 다른 신체 비율에 맞춰서 재다가 억지로 가슴 위쪽을 그리려다 보니 비율이 찌그러져버린 경우다. 
교차나 유기성 면에서는 엇갈아 잡은 클럽벨이라든지, 소품과 거울 덕분에 충분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계속 그리다가 조금 오버하는 바람에 각도가 살짝 아쉬운 창문까지 그리고 말았다. 그냥 직선툴을 사용할까도 생각했지만, 캔버스 전체가 보이는 시점에서는 얇은 직선툴을 작은 부분에 사용하기가 어렵고, 혹시라도 쉬프트키를 잘못 눌러서 실행취소 생기는 게 너무 귀찮은 나머지 그냥 손으로 긋다가 이 사달이 나고 말았다. 사실 중간에 그림이 깔끔하게 나온 어느 시점에 딱 멈췄다면 일치율을 10%는 더 줬을 텐데 창문이 살짝 이상해지는 바람에 일치율을 깎아먹어서 너무 아쉬웠다. 과연 언제 멈춤이 필요할지 아는 감각도 라이브 드로잉을 하다 보면 어느 정도 데이터가 쌓이면서 딱 알게 되지 않을까.

 

240124 croquis
240124 croquis.clip
2.06MB

 

*본 포스팅에 첨부한 .clip 파일은 카피레프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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