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라이브 드로잉 #38 - 아쉬운 디자인, 나아진 크기 조절, 이스에서 온 방랑자들

dbw84 2024. 1. 31. 08:35
반응형

live drawing #38

 

오늘은 실패 0회, 이동과 변형 0회, 실행 취소 0회, 일치율은 70%로 작업을 마무리했다. 포즈는 거의 떠오른 대로 그렸지만, 전체적으로 디자인 수준이 아쉬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웠고 그나마 머리 크기 조절은 조금 익숙해졌다는 느낌을 받은 작업이었다.

 

아쉬운 디자인

우선은 갑옷 디자인이 너무 유기성이 떨어지게 나오고 말았다. 초등학생이 찰흙 덩어리를 그냥 덕지덕지 붙여놓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나마 괜찮은 건 손목 부분인데 약간 틈이 벌어진 부분을 잘 묘사했고 양쪽 모두에 알맞게 들어가서 그림에 나름대로 좋은 효과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어깨나 허벅지 쪽은 근본도 없고 예쁘지도 않은 3류 디자인이 나오는 바람에 일치율을 심하게 깎아먹고 말았다. 만약 왼 어깨와 왼팔 연결부에 손목과 같은 느낌을 주기만 했어도 일치율이 조금은 더 올라가지 않았을까 싶다.
여태까지는 갑옷 디자인이라고 하면 무의식적으로 플레이트 아머 시대 디자인을 떠올렸는데, 혹시 다음에 또 갑옷을 그리게 된다면 그때는 그 이전 시대 디자인들을 공부해서 보다 일상복에 가까운 디자인에 포인트만 가볍게 적용하는 방식으로 작업해 봐야겠다. 어쩌면 그 편이 그림도 예쁘게 나오면서 작업도 쉬워지지 않을까. 아니면 외형 자체를 아예 거의 인체와 일치하면서 도형만 남은 형태로 단순하게 디자인하고 거기에다가 메카닉 디자인에 사용하는 패턴 일부를 아주 조금만 적용하는 방식도 생각해 봤는데, 보는 사람이 SF로 착각하지 않도록 판타지 느낌이 나는 포인트만 잘 넣어준다면, 그림 밀도도 높아지고 보기에도 좋으면서 유기성도 높은 결과물이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꼼수로 사용하는 디자인 팁이 없는 건 아닌데, 만약 전신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그릴 때도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광범위한 종류의 팁을 얻게 된다면 모든 작업이 훨씬 편해질 테니, 다음에 갑옷을 그릴 일이 있다면 반드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해 보자.

 

나아진 크기 조절

이번 작업은 9등분 그리드로 보면 등분선에 걸치는 느낌보다는 정가운데 사각을 손과 얼굴로 꽉 채웠다는 느낌이 강하다. 원래는 요즘 연습하는 얼굴각도를 그대로 반영하면서 지금 포즈를 그대로 그리려고 했지만, 손과 검을 모두 그리고 나서 얼굴 각도가 생각한 대로는 절대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연습 그림보다는 약간 돌아간 각도로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얼굴을 대략적으로 그리고 나자 입이 생각보다는 약간 뒤로 쏠린 게 보여서 우선은 머리카락으로 일그러진 얼굴 형태를 최대한 보정했고, 나중에는 왼눈과 왼 어깨 쪽 명암으로 보정을 마무리했다. 다행히 모양이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게 나왔지만, 뺨 부분을 보정하기 전에 몸통을 미리 그리는 바람에 머리 크기가 아주 미묘하게 작은 느낌이 되고 말아서 그 점은 조금 아쉽다.
라이브 드로잉을 한다고 하면 연습을 많이 해서 처음부터 머리 크기가 딱 맞게 나와야 하겠지만, 솔직히 지금 수준에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려우니 굳이 보정을 염두에 두고 그림을 그리겠다면, 이번 작업처럼 크게 그렸다가 조금씩 깎는 방식이 라이브 드로잉에는 더 알맞은 듯하다. 얼굴만 한정해서 조금 더 명확하게 구분하자면 눈은 작게 그리고 얼굴형은 크게 그리는 게 나중에 수정하기가 편할 것이다. 이건 팁이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아무튼 얼굴 크기 조절에 완전히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이 방법을 기억해 놓아야겠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크기 조절 덕분에 이번 그림은 실패 없이 마칠 수 있었다. 라이브 드로잉을 처음 시작할 때와 비교하면 훨씬 나아졌다는 점에 위안을 삼도록 하자.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 작업을 마치고 나니 '손 크기를 약간 과장하려는 구도에서 이런 자세와 연출일 때는 무조건 손 크기를 머리 크기와 같게 해 주면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작업에서 그리드를 써서 크기를 정밀하게 계산하는 게 아니라 '이런 때는 이 크기로 해주면 좋다'는 공식을 가지고 있으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지금 당장 찾아볼 수 있는 주제는 아닌데 혹시 나중에 다른 그림에서 비슷한 경향성을 발견한다면 진지하게 고민해 보면 좋을 듯하다.

 

이스에서 온 방랑자들

어디서 자세하게 써놓거나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내 모든 판타지 그림의 원형은 '아돌 크리스틴'에 닿아있다. 물론 디자인적인 부분에서 그 정도를 그릴 수 있다는 건 당연히 아니고 단지 판타지를 그릴 때는 항상 '이스'를 떠올리면서 그림을 그린다는 뜻이다. 내가 가진 모든 판타지에 관한 이미지는 어린 시절에 플레이했던 '이스 2 스페셜' 위에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내가 항상 내 모든 SNS에 써놓는 소개문구인 '타소스에서 온 사나이'도 실은 이스 3편의 부제 '이스에서 온 방랑자들'에서 따왔을 만큼 내게 이스는 각별하다(마지막으로 이터널 시리즈까지만 플레이하고 나이를 먹고 나서 나온 시리즈는 해보지는 않았다). 당연히 이런 그림을 그릴 때면 언제나 이스가 생각나면서 그때의 향수가 떠오른다.
만화 그리는 쪽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유독 장대한 판타지 만화를 그리고 싶다는 꿈을 이야기하는 만화가 지망생을 무수히 볼 수 있는데, 사실 나도 흔하디 흔한 그런 이들 중 한 명이다. 내가 여태껏 써놓은 이야기들은 대략 열댓 개 정도 되는데 크게 분류하면 첩보, SF, 판타지 이렇게 세 장르로 나뉜다. 솔직히 이중에 가장 쓰기 쉬운 건(잘 쓰는 게 아니다!) 판타지여서 가장 공들여야 할 작업으로 남겨놓았는데, 언젠가는 반드시 공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이번 작업도 그렇고 내가 그리는 모든 이런 류 그림에는 언제나 그 갈증이 담겨있다고 보면 되겠다. 과연 언제쯤 갈증을 풀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아주 서서히 빛이 비치는 것 같기도 하다. 조금만 더 버텨보자.

 

240130 croquis
240130 croquis.clip
1.81MB

 

*본 포스팅에 첨부한 .clip 파일은 카피레프트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