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작업은 실패 3회, 이동과 변형 0회, 실행 취소 다수, 일치율은 70%로 마무리했다. 이번에는 특별히 구상에 구애받지 않고 얼굴을 예쁘게 그리고 나서 그에 맞게 그려보자는 생각으로 작업을 진행했고, 일치율이 많이 높지는 않아도 평범하면서 깔끔하게는 마무리할 수 있었다.
무작위 구상
이번에는 40번째 작업도 기념할 겸 마음 편하게 작업하고 싶어서 너무 열심히 구상하지 않고 가볍게 그려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결국 '예쁜 여자'만 나오면 된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시작했고, 솔직히 얼굴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앞서 실패한 3장보다는 나으면서 '톤을 집어넣는다면 살릴 수 있을 정도' 퀄리티로 나온 시점에서 그냥 몸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정면에서 아주 살짝 돌아간' 얼굴이 애매하다면 애매해서 그리기가 어려운데, 그리면서도 만약 이 각도를 진짜 예쁘게 스케치 없이 거의 바로 그릴 수 있다면 만화를 그릴 때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원고에 워낙 많이 나오는 각도니 그럴 수밖에. 이번에는 하악을 조금 이상하게 그려서 너무 정면처럼 나온 감이 없지 않은데 다음에 그릴 때는 유의하도록 하자.
이번 그림은 9등분 그리드로 볼 때 가로로는 등분이 비교적 명확한 편이다. 우선은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양 팔이 등분선에 세로로 걸쳐서 전체적인 가로 흐름을 나눠주고 있다. 한데 이 등분을 나누는 요소가 워낙 일자로 리듬 없이 놓인 느낌이어서 가로등분 말고 세로등분을 나눠주는 느낌이 나는 부분도 조금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역할을 담당할 소품들로 그림 왼편을 채워주었다. 자세히 보면 엄밀하지는 않아도 위아래로 ID카드 밑단과 서류 밑단이 등분을 나눠주면서 리듬감을 내는데 완성하고 나서 보니 나름대로 괜찮은 선택이어서 만족스러웠다.
작업이 구도면에서 깔끔한 것과는 별개로 만약 여기서 얼굴이 조금만 더 예쁘고, 머리끈을 잡아당기는 오른손 모양이 조금만 더 명확하고, 왼손 크기가 지금보다 조금만 더 작고, 유두를 표현한 터치가 조금만 더 깔끔하면서 브래지어가 가슴에서 나온 게 더 잘 보였다면(써놓고 보니까 전부 다인 듯한데 아무튼) 일치율을 10%는 더 주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무래도 무작위 구상이다 보니 오히려 아쉬운 점이 더 많이 눈에 띄는 것 같기도 하다.
질감 연습
사실 여태껏 라이브 드로잉을 진행하면서 무조건 흑백으로만 작업하니까 검은색 스타킹 질감을 그릴 수가 없어서 조금 답답했는데, 데니아는 최고로 높다고 치고 펜터치로 하이라이트 부분만 살짝 표현하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번 작업 덕분에 처음으로 들었다. 물론 시도해 보고 생각처럼 안 나오면 포기하겠지만, 아무튼 다음 작업부터는 세로 캔버스로 바꾸면서 시험 삼아 그려볼 생각이다.
만화를 그릴 때도 그렇고 일러스트를 그릴 때도 펜 크기를 완전히 고정해 놓고 그리는 스타일이어서(15픽셀 G펜 하나에 지우개+색칠용으로 50픽셀 G펜 하나, 이렇게 두 크기만 사용) 아주 가는 펜은 쓸 일이 거의 없었는데, 라이브 드로잉을 할 때는 빗금을 실수 없이 넣으려면 아무래도 필압으로 굵기 조절을 섬세하게 하기보다는 그냥 얇은 펜을 쓰는 게 편해서 크기를 처음으로 바꾸면서 작업하다 보니 스타킹 같은 넓은 면적에도 빗금을 안정적으로 넣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릴 때는 시간 관계상 빗금을 넣을 면적을 최대한으로 좁게 줄이겠지만, 아무튼 이번 연습을 계기로 완전 흑백에서도 맛깔나게 검은색 스타킹을 그릴 수 있는 노하우가 생긴다면 정말 반갑고 행복할 것 같다. 혹시라도 정말 마음에 드는 퀄리티로 나오게 된다면 매번 스타킹만 그리게 될지도 모르니 질감 연습에 너무 심취하지는 않도록 조심하자.
물론 얇은 펜으로 바꾼다고 해서 모든 빗금이 무조건 쉬워지는 건 아니고 예쁜 연출이 필요한 빗금은 여전히 그리기 어려운 듯하다. 이번 작업 마지막에 얼굴에 빗금을 넣다가 실패해서 롤백을 크게 했는데, 역시 질감용으로 꽉꽉 채우는 빗금과 얼굴에 들어가는 예쁜 빗금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걸 느꼈다. 아직 라이브로 실수 없이 부끄러운 효과를 넣기에는 내공이 부족하니 그런 빗금은 좀 더 연습해서 노하우를 쌓은 다음에 시도해 보도록 하자.
관능적인 요소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 눈에 띄는 분들 중에 진짜 단순한데도 관능적인 느낌이 나게 그리시는 분들이 있다. 작업량이 많은 것도 아니고 효과가 화려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섹시한 느낌을 낼 수 있을까 싶은 그림을 보고 있으면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제자로 삼아달라고 빌고 싶은 심정을 느끼곤 한다. 나는 이제 겨우 아주 조금 그런 느낌을 낼 수 있게 됐는데, 라이브 드로잉으로는 또 전혀 다른 이야기여서 요즘은 뭔가 리셋된 것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받곤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너무 노골적이거나 인체가 현실과 심하게 동떨어진 건 안 좋아해서 더 미묘한 느낌으로 관능적인 요소들을 배치하려고 하는 편인데 그래서 라이브 드로잉에는 더 불리한 것 같기도 하다. 만약 인체와 상관없이 관능적인 기호를 노골적으로 구사할 수 있다면 아마도 지금보다는 관능적인 그림을 그리기가 훨씬 쉬워지지 않을까 싶은데, 성향상 그렇게 하는 게 간단하지는 않다. 지금 내 실력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고 손짓을 살짝 바꾸고 흉곽을 살짝 돌리는 걸 처음 단계부터 계산해서 섬세하게 구사하기는 어려울뿐더러 매번 관능적인 느낌에만 집중해서 연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아마도 내 라이브 드로잉에서 관능적인 느낌이 제대로 나는 건 아주 먼 미래가 되지 않을까.
어쩌면 다른 작가님들도 작업량만 덜해 보일 뿐 사실은 엄청 지워가며 힘들게 그리고 있는데 단지 다른 사람 입장이니까 쉬워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날로 먹고 싶은 이 욕심은 언제쯤 잦아들까. 관능적인 요소를 잘 다루시는 분들이 진짜 너무 존경스럽다. 내게는 없는 능력이라서 더 그런 걸지도?
*본 포스팅에 첨부한 .clip 파일은 카피레프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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