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실패 1회, 이동과 변형 0회, 실행 취소 2회, 일치율 80%로 작업을 마무리했다. 얼굴은 연습한 각도여서 부담 없이 바로 그릴 수 있었고 나머지 부분도 크게 어려움 없이 곧바로 그릴 수 있었다. 소라게 얼굴이 이렇게나 다양한 모양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해준 즐거운 작업이었다.
프레세페 성인星人
달 기지에서 길을 잃은 프레세페 성인인 마일로(지구식 이름)를 거주구역에 데려다주는 우주인. 프레세페 성인은 22세기에 조우한 약 20여 종의 외계인 중에 인간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쌓았는데, 이는 그들이 입을 통해 감정을 드러내는 거의 유일한 종이기 때문이었다. 접촉 초기에 이미 입꼬리 때문에 화제가 됐던 그들의 외모 덕분에 관련된 연구를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었고, 그들이 인간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자아를 가졌으며 기분이 좋을 때는 입꼬리를 올리고 기분이 나쁠 때는 입꼬리를 내린다는 사실을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단순한 신호체계 하나 덕분에(놀랍게도 그들은 충분한 이성과 감정을 지녔고 인간의 '거짓말'이라는 개념도 이해했지만, 그들 스스로는 결코 표정을 숨기는 방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았다) 굉장히 안전한 상태로 모든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고, 그렇게 그들은 인류와 가장 친밀한 종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소개될 때 '소라게 성인'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소라게형 외계인'을 오역한 것이다. 성인星人이라는 단어 자체가 '특정한 별에 사는 지성체'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그들을 소라게 성인이라고 부르려면 그들이 '소라게 성단'에서 왔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는 그들이 프레세페 성단에서 왔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졌을 때, 소라게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종이 우연히도 게자리에 있는 성단에서 왔다는 점이 화제가 되면서 이를 강조한 기사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의미가 와전되어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올바른 표현인 프레세페 성인으로 교정되었고 '소라게형 외계인'과 함께 적절히 병용되고 있다. 여기까지가 그림을 그리며 떠올린 내용이다.
단순한 구도
이번 그림은 처음 떠올렸을 때는 두 얼굴이 정확히 가로를 삼등분하는 지점에 있도록 하고 싶었다. 그런데 첫 얼굴을 약간 왼쪽에 그리게 되면서 구상과는 다른 그림이 나왔고 결과적으로는 오른쪽 여백에 우주를 그릴 수 있어서 오히려 약간 더 리듬감이 있는 그림이 나오게 되었다. 가로 삼등분을 기준으로 보면 두 사람의 얼굴 중심선이 아닌 왼뺨이 세로선을 이루고 있으며, 가로선은 세로선에 비해서는 불명확하지만, 그래도 우주복 목 부분에서 좌우로 확장하는 큰 대각선 흐름이 있어서 심한 단조로움은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다. 이번 작업을 9등분 그리드 구획별로 보면 1) 우주복 일부, 마일로 머리 2) 우주복 헬멧 상부, 두상 3) 우주 4) 우주복 손목과 손, 마일로 하관 5) 헬멧 내부 장치, 우주인 얼굴 6) 우주 7) 우주복 손가락, 마일로 몸 8) 우주복 흉곽 9) 왼손 2개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번 작업은 전혀 특별할 것 없는 단순한 구도여서 소재를 특이한 것으로 골라서 평범함을 덮으려고 했다. 입꼬리에 관한 설정도 '내가 저런 외계인을 만난다면 부디 기분 정도는 알 수 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에서 나왔는데(저런 얼굴인데 기분을 알 수 없다면 얼마나 무서울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솔직히 그림만으로는 알아보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마일로의 입을 그릴 때는 그가 집에 다 와서 빙긋 웃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렸는데(그림 그리는 사람이라면 으레 그러듯이 나도 빙긋 웃으면서 그렸다) 아마도 그림 설명을 보지 않은 사람은 그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알 수 없지 않을까.
이번 작업에서 실행 취소는 2회 모두 버킷툴 관련 실수 때문에 했다. 한 번은 영역을 제대로 닫지 않고 부어서, 다른 한 번은 무심코 전체 채우기 버튼을 눌러서였다.
여담
아무래도 과학에 관련된 그림이니 여담을 좀 적자면, 개인적으로 국가가 반드시 발전에 치중해야 하는 분야를 꼽으라고 한다면 군사와 과학을 꼽는 편이다. 간절한 바람으로는 유인 달 탐사를 무조건 미국 다음으로 해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은데, 당연히 그 과정에서 쌓이는 기술력과 노하우가 어마어마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사람을 달로 보냈다고 하는 자부심'과 같은 무형의 자산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무의식에 깊숙이 각인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문화 강국'이라는 자부심이 뚜렷하게 자리 잡아서 수많은 유무형의 결과물을 우리가 누리고 있는데, 과학이나 군사분야라고 못할 것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이런 그림을 그릴 때면 들곤 한다.
요즘은 정말 재밌는 시대인 듯하다. 외계인은 몰라도 UAP는 이제 완전히 공식적인 석상에서 다루는 시대가 됐다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제대로 과학적이고 잠정인 방식으로 사고하는 이들이 자료를 꾸준히 모은 덕분에, 이제 오로지 직관에만 의지해서 UAP를 무시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간 것이다. 우주는 물론 AI나 로봇, 바이오 관련 담론도 엄청나게 꿈틀거리고 있으니, 정말로 완전하게 '끼인' 세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향후 2, 30년 내로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시기로 접어드는 것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린다. 만들어놓은 SF를 10년만 일찍 그렸어도 참 좋긴 했겠지만, 오히려 지금 시대를 고스란히 지나고 나면 더욱 풍성한 세례를 받을 테니, 한편으로는 기꺼운 마음으로 묵혀놓아도 썩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너무 다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주어진 원고를 열심히 그리도록 하자.
*본 포스팅에 첨부한 .clip 파일은 카피레프트입니다.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이브 드로잉 #44 + 연습 (0) | 2024.03.02 |
---|---|
라이브 드로잉 #43 - 한국 전통 언더붑 (0) | 2024.02.18 |
라이브 드로잉 #41 - 평범한 자세, 집요함과 성실성, 작업량 줄이기 (0) | 2024.02.08 |
라이브 드로잉 #40 - 무작위 구상, 질감 연습, 관능적인 요소들 (0) | 2024.02.04 |
라이브 드로잉 #39 - 월인, 커다란 실패, 가볍게 그리기 (0) | 2024.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