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실패 1회, 이동과 변형 0회, 실행 취소 1회, 일치율 80%로 작업을 마무리했다. 이번에는 특별히 스타킹 질감을 연습하려고 구상한 작업이어서 모든 요소를 목표에 맞게 조율했다. 라이브 드로잉을 시작한 취지에는 맞지 않은 결과물이 나왔지만, 새로운 시도 자체는 재미있어서 즐겁게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평범한 자세
이번 작업은 어차피 스타킹 질감을 연습하려고 시작해서 되도록 실패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세도 비슷한 자료가 많은 포즈로 정했고 모든 면에서 특별할 것이 없는 구도와 분위기를 선택했다. 다행히 의도가 들어맞아서 처음에 얼굴이 한 번 너무 크고 안 예쁘게 나온 거 말고 다른 실수는 없었고(실행 취소 1회는 태블릿 오류로 펜이 패드와 떨어진 상태에서 점이 찍혔다) 스타킹 질감도 예측한 것과 거의 비슷하게 들어가서, 마음에 드는 정도로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림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아쉬운 점을 꼽자면 지금 이 기법으로는 데니아가 높은 스타킹밖에 그릴 수 없기 때문에 실제로 많이 신는 스타킹이 주로 보여주는 리듬을 그대로 그리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밴딩 부위가 문양이 많은 검은색, 그 밑에 문양 없이 완전히 검은 부분 약간, 그리고 고동색 혹은 커피색으로 내려가는 리듬이 보기에 가장 예쁜데 지금은 반대로 밴딩 부분을 더 연하게 그릴 수밖에 없어서 맛이 안 산다고 해야 할까. 이번에 필압을 거의 조절할 수 없는 얇은 펜을 써보니 노동집약적으로 작업하기만 한다면 데니아가 낮은 스타킹도 어찌어찌 그릴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굳이 그렇게까지 시간을 오래 사용하고 싶지는 않기도 하고(그럴 거면 굳이 라이브 드로잉으로 작업하기보다 회색을 써서 일반 그림으로 그리는 게 낫지 않을까) 지금 정도 데니아라면 흑백으로 작업할 가치가 있지만, 좀 더 투명한 스타킹은 이런 기법으로 작업한다고 해서 더 예쁘게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도전해 보는 정도로는 의미가 있겠지만) 앞으로도 라이브 드로잉으로 이것보다 더 낮은 데니아인 스타킹을 그릴 일은 없을 듯하다.
집요함과 성실성
이번 작업은 집요한 부분에서는 스타킹을 잘 마무리했기 때문에 괜찮은 점수를 줄 수 있겠는데, 성실성 면에서는 소실점 때문에 좋은 점수를 주기가 어렵다. 사실 첫 술병 바닥부터 구도가 크게 틀릴뻔한 걸 고치면서 그리기 시작했고 이후로도 소실점을 제대로 연결하지 않고 그리다가 큰일 날뻔한 상황을 여러 번 겪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얼음통을 그릴 때도 바닥과 윗부분을 계속 수정하기도 했고(잘못 그린 선을 얼음으로 바꿀 수 있어서 편하긴 했다) 스팽킹 패들을 그릴 때는 아예 구도가 어그러져서 여러 면으로 고생했는데, 만약 이 그림이 크게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말채찍이 어떻게든 패들과 얼음통 중간에서 이 둘을 중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처음부터 조금만 참으면서 천천히 소품 하나하나를 전부 소실점에 연결해 보고 그대로 그리기만 했다면 이렇게 고생하지는 않았을 텐데, 역시 이런 면에서는 성실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펜을 많이 긋는다고 성실한 게 아니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을 놓치지 않고 짚어주는 게 중요한데 이번 작업에서는 뭐가 그리 급했던 걸까. 그래도 어설프게나마 변명해 보자면 아무래도 스타킹을 그리느라 집중력을 전부 소진해 버려서 그러지 않았나 싶긴 한데, 공들여서 그린 그림을 한 번에 날려버리고 싶지 않다면 다음에는 이런 에너지 소진까지도 충분히 고려해서 작업하도록 하자.
작업량 줄이기
이번 작업은 9등분 그리드로 보면 여백이 많아서 구획이 딱딱 나뉘고 주제도 명확한 편이다. 구획별로 보면 1) 소품 2) 얼음통, 소품, 머리 3) 소품 약간, 여백 4) 하네스, 패들, 여백 5) 술병, 가슴 6) 스마트폰, 여백 7) 종아리 8) 허벅지 9) 엉덩이, 하이힐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원래 계획상으로 왼쪽에는 술병이랑 얼음통만 그리고 나머지 소품들은 오른쪽 중하단 구석에만 조금 넣을 생각이었다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벨트 뭉치를 너무 얼굴 가까이 그리는 바람에 그 덩어리가 얼굴을 흐릿하게 망치는 느낌이 들어서, 차라리 검은색 다른 소품을 꽉꽉 채워 넣어 다시 얼굴이 돋보이게 만들어야겠다는 계산으로 소품들을 배치했고 다행히 마지막에는 괜찮은 느낌으로 작업을 되살릴 수 있었다.
라이브 드로잉을 주제로 유튜브를 시작했지만, 사실상 '흑백 연습'도 목표에 들어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꽂힌 스타킹을 그리느라 요 이틀간 상당히 많은 에너지를 쓰고 말았다. 점점 그림을 그리는 에너지가 높아지는 건 내 기질상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다만, 이대로 계속 퀄리티를 높이는 건 취지에는 맞지 않으니 다음 작업부터는 신경을 써서 대충 그리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말이 조금 이상하지만, 아무튼). 저번 작업 때 캔버스를 세로로 바꾸기로 했다고 적었는데, 영상 길이를 30초 내외로 바꾸면 무조건 쇼츠로만 올라가서 캔버스 각도는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앞으로 계속 영상을 짧게 올릴 거여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정했는데, 계속 가로 캔버스로 그리면서도 주제를 덜 잡고 인체만 그릴 수 있는 형식을 정하는 게 라이브 드로잉을 가볍게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할 듯하다. 오늘은 쉬는 날이니까 편히 뒹굴거리면서 어떻게 작업량을 줄일지 생각해 보도록 하자.
*본 포스팅에 첨부한 .clip 파일은 카피레프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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