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라이브 드로잉 #39 - 월인, 커다란 실패, 가볍게 그리기

dbw84 2024. 2. 2.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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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 drawing #39

 

오늘은 실패 2회, 이동과 변형 0회, 실행 취소 다수, 일치율은 50%로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림 중간에 전혀 다른 기획으로 방향을 틀어버려서 아쉬운 작업이 되고 말았는데, 변경한 구상에서 간단한 장면들이 떠올라서 그래도 뭔가 조금은 인상에 남은 작업이 되었다.

 

월인

21세기 말엽에 최초로 달에서 약 3년에 걸쳐 20명의 아이들이 태어난다. 안타깝게도 생존율이 높지는 못해서 그중 5명만 살아남았고 그렇게 지구밖 출산(방사선과 대기 성분을 제외한 모든 우주 환경에 성장 과정 전체를 노출하는 경우만 해당, 출산 직후 지구로 이송하거나 보호장치에 들어가는 경우는 이에 포함되지 않는다)에 대한 모든 실험은 잠정적으로 중단된다. 그렇게 살아남은 월인들은 그들이 겪은 비극적인 일과는 별개로 미디어를 통해 시대의 아이콘으로서 각광받게 되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상당한 명예와 부를 거머쥐게 된다. 그들은 생애 초기에 형성된 신체적인 조건 때문에 오로지 달에서만 지내야 했으며, 다 자랄 경우 키가 약 3미터에 육박했다. 그들의 몸은 질환으로 커진 이들과는 다르게 일반적인 비율을 유지했고, 거인이면서도 멀끔해 보이는 외형은 대중이 그들에게 신의 이미지를 투영하게 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기에 미디어와 정치권은 그만큼 그들에게 여러 이미지를 덧씌워 이용하려고 했고, 그러한 이유로 이들은 가치를 창출하며 대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월인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리사는 성장과정에서 그런 그들의 이미지에 매료되어 달에서 사는 것을 꿈꾸게 된 엔지니어 지망생으로, 대학원 과정을 마친 후 곧바로 달 이주정책 관련사업에 지원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다. 그렇게 달로 이주하게 된 그녀는 월인 중 한 명인 윌리엄과 매우 가깝게 생활하는 구획으로 배정되고, 공간은 다르지만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둘은 급격하게 가까워지다가 결국 연인이 되기에 이른다. 곧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서 삶의 새로운 장으로 접어들었음을 직감한 그녀는 동시에 여러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자신이 동경했던 그 거대한 신체가 실은 유전자 조작과 대기질 조절 등을 통해 만들어낸 실험물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러한 유전정보가 자기 아이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일련의 고민 과정에서 자신이 품었던 이상적인 자기 이미지들은 모조리 박살 나고, 자신의 심리가 사랑이 아닌 거인기호증에 가깝다는 사실과 더불어 갖가지 이기적인 본모습이 드러나지만, 그런 자기 모습에 직면하면서 자신을 더 알아가고 받아들이기보다는 이 모든 수치심과 갈등을 일시에 외면해 버린 채 자신을 붙드는 윌리엄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지구로 돌아오고 만다는 씁쓸한 결말...이 이번 그림을 그리며 떠오른 내용이다.

 

커다란 실패

toned drawing #39

 

원래 보통은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에 점을 찍거나 빗금을 넣어보고 마음에 안 들면 체념하면서 롤백으로 마무리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그림 중간에 한 번은 패턴 뭉치, 한 번은 다량의 빗금을 잘못 넣어서 두 번이나 크게 롤백했고, 그게 그림 마지막 단계에서 그런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상 두 번 실패한 것으로 기록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실패 그림이 없는데 실패가 2회로 잡힌 것이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실은 더 커다란 실패가 있었는데, 머리카락 묘사 직전까지 그려놓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도저히 처음에 생각했던 구상으로는 그릴 수가 없어서 콘셉트를 아예 완전 다르게 변경했다는 점이다. 기계 디자인이 생각과 너무 동떨어지게 나와서 어쩔 수 없이 방향을 그렇게 틀 수밖에 없었는데, 혹시라도 나중에 그 콘셉트를 그대로 그리게 되면 그 작업이 이번 그림의 원형이라는 사실을 그때 밝히도록 하겠다.
어쨌든 실패를 감지하고 나서 이 그림을 어떻게 살릴까 고민하다가 사람을 하나 더 넣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처음에는 예쁜 여자를 한 명 더 추가할까 하다가 남자로 변경, 거기에 몸집까지 엄청 키워주면 '자기가 직접 구멍에 들어갈 수 없어서 덩치가 작은 엔지니어에게 부탁하는' 상황을 그림에 서사로 녹일 수 있겠다 싶어서 새 구상으로 작업을 재개했다. 실제로 남자 얼굴과 손만 더 들어가는 구상이라 어렵지는 않았고 어찌어찌 작업은 마치게 되었는데, 깊이감이 꽤 필요한 작업임에도 밀도가 낮은 기계 디자인 때문에 느낌이 안 살아서 몸을 베베 꼬며 괴로워하다가 우선 동영상은 원본으로만 만들고, 그 위에 톤을 넣은 버전도 그려보았다.
이번 작업으로 '외곽선만' 굵게 해주는 터치는 인물에게는 나쁘지 않은데 기계에는 쓰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고(흑백인 경우에 해당. 물론 디자인이 좋으면 상관은 없는데 매번 그렇게 나오기는 어려우므로), 기계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오롯이 보여주는 그림자나 다른 장치를 반드시 처음부터 고안하고 나서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이해하게 되었다. 만약 처음부터 이 콘셉트였다면 입은 더 미소 짓고 눈까지 웃게 그렸겠지만, 첫 구상에서는 비장한 표정으로 조종간을 잡은 느낌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나중에 떠오른 디테일은 반영할 수가 없었다.

 

가볍게 그리기

라이브 드로잉을 처음 시작할 때는 온라인에 올리는 방식을 고려해서 캔버스를 가로로 길게 정했는데, 요즘은 폰에서 보는 사람도 많고 세로로 길게 그려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시험 삼아 41회부터는 세로 캔버스로 바꿔보려고 한다. 세로 연작으로 10개를 올려보고 반응에 따라 세로를 유지할지 어떻게 할지를 결정하려는데, 사실 가로 캔버스여서 사람을 가볍게 그리는 데는 제약이 많은 관계로 반응과는 상관없이 세로 캔버스를 유지할지도 모르겠다. 가로 캔버스일 때는 얼굴을 어느 정도 연습할 수 있는 크기로 그리려면 몸이 반드시 잘려서 만약 그 크기 그대로 전신을 그리고 싶을 때는 인체를 구부리거나 비튼 자세로 캔버스에 욱여넣어야 하고, 우뚝 선 자세로 전신을 그리면 인물 양옆이 휑하게 비어버려서 그 공간을 채우려고 갖은 꼼수를 사용하게 되면서 가볍게 그리기는 물 건너가 버리기 때문이다.
벌써 40개 가까이 그렸다는 게 믿기지 않고 반응도 예상을 훨씬 웃돌아서 나도 모르게 힘을 주게 됐는데, 블로그도 그렇고 정비가 되는대로(언제 될지는 미확정이지만) 연습에 힘을 쭉 빼고 원래 의도대로 가볍게 인체연습만 하는 상태로 돌아가야겠다. 재미있는 경험을 하는 요즘이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여러 갈래로 찢어지는 느낌을 받는데, 과연 한 방향으로 쭉 갈 수 있는 환경은 결코 주어질 수 없는 걸까? 아니면 이제 문턱에 거의 도달한 걸까? 열심히 보낸 거로만 따지면 인생에서 작년이 최고였다고 생각했는데 올해는 더 심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할 모양이다.

 

240201 croquis
240201 croquis.clip
2.11MB

 

*본 포스팅에 첨부한 .clip 파일은 카피레프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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